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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재미있는

[소설책]트렁커 - 자동차 트렁크에서 자는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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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의 비극 훔쳐보기.

 요즘 텔레비전은 다 똑같은 댄스음악에 밤10시이후의 미니시리즈 말고는 별로 행복을 주지 않아서, 얼마전 어느 블로그에 소개된 소설책을 골라 며칠간 읽어보았습니다. 지나친 살인이라는 일본 소설가의 책도 찜해놓았는 데, 이 소설이 더 재미있어 먼저 읽고 느낌을 써봅니다.

'중앙 장편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책 표지에 씌어 있어서 사실 좀 망설였습니다. 너무 예술적인 것은 제가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는 편견 때문이지요. ^^;;
그러나, 이 책은 은유적인 내용이 활자속에 숨어있고, 겉에 드러난 에피소드들은 매우 매우 유머러스하였습니다.  공포, 괴짜, 싸이코, 슬픔, 사랑... 모든 것이 주인공의 캐릭터 속에 숨어있는 성격입니다.


트렁커
국내도서>소설
저자 : 고은규
출판 : 뿔(웅진문학에디션) 201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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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에 저자 고은규님의 말에 보면 작가분 스스로도 어렸을 적 불에 탔을 때의 공포와 엄마에 대한 원망, 여러가지 억압된 기억을 최근까지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온두라는 여자 또한 자신의 끔찍했던 과거를 끝까지 외면하며 멀쩡한척 당당한척 별 우스꽝스런 짓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손가락을 잘린 남자와 아버지에게 죽을 뻔 했던 여자.

그들은 높은 천장 아래 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인 집에서는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죽을 것 같은 공포 때문이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자동차 트렁크 속에 숨어서 쪼그리고 자야만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트렁커는 트렁크에서 자는 사람들이 모이는 온라인 카페의 회원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들은 그 카페에서만큼은 자유롭게 자신의 상황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관찰하는 만화가.

어느 날 주인공 온두의 옆집으로 무식하게 짖어대는 큰 개를 데리고 한 여자가 이사를 왔습니다. 온두는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짖어대는 개소리를 신고하지 않는 너그러움을 보였습니다. 이사온 여자는 만화가였고, 온라인에 인기있는 만화를 연재하고 있었습니다.
온두는 오해하지 말하는 이웃여자의 말투가 왠지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해 그녀의 만화를 뒤져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만화가는 자기 옆집의 기괴한 여자에 대해 연재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만화속의 눈썹에 맞춰 일자로 자른 새까만 머리, 밤마다 짐싸들고 나가는 괴팍한 여자.. 는 바로 온두였습니다.



  왠지 끌리는 동료 트렁커 름.

연애도 안하고, 친구도 사귀지 않는 온두는 자기 자동차 옆으로 이사 온 같은 트렁커 름에게 이상하게 끌립니다. 사실은 어릴때 특별한 인연으로 만났던 남자라는 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름이 예전에 보았던 청초하고 슬픈 눈의 어떤 배우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남자 름은 그녀를 만나는 순간부터 왠지 포근하고 친근하게 대화를 이끌어갑니다.

"우리 게임한판 할래요?"
름이 그녀에게 건네는 첫데이트 신청입니다. 남자주인공의 이 대사는 기억에 아주 오래 남았습니다. 온두의 마음속에서도 나오지만, 술한잔 할래요? 커피 한잔 할래요? 보다 훨씬 친근하면서 부담없는 대사...



   너는 온통 거짓말만 하는 아이야.

온두는 방송을 타고 유명해진 후, 산후 우울증 예방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날으는 유모차 판매에 엄청난 매출을 올립니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그녀는 친하게 지냈던 카페 남자 회원 '피'에게 터진 입으로 마구 흘러나오는 거짓과 기만으로 일관하다, '피'의 자살로 그들의 교우관계는 끝맺고 맙니다. 그녀에게는 또 한번의 억압된 죄책감이 자리잡게 되지요.


이 소설에서 주인공 둘은 달빛아래 게임판을 벌이고 진 사람은 서로의 과거를 말하는 벌칙을 수행합니다.  먼저 름이 자신의 이름이 왜 '이름' 인지, 아버지에게 어떤 고통을 겪었는 지, 그 아버지는 왜 아들에게 그런 고통을 줄 수밖에 없었는 지, 모든 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온두의 차례이지요. 온두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과거는 살면서 때때로 한조각씩 튀어나와 그녀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그녀의 고통을 이 남자에게 보여줄지 말지 오랜기간 고민합니다.



   누군가는 살고 있을 온두와 름의 삶.

사람들은 모두 사교의 가면을 쓰고 사회생활을 합니다. 이 사교의 가면을 쓰지 못하고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친구들에게 괴물취급을 당하게 되고, 괴롭힘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런면에서 온두와 름은 사교의 가면을 잘 쓰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은 잘하고 있죠. 직장에서 온두는 성격 안좋은 사람 취급은 받을지언정 괴물취급, 이상한 사람취급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은 온갖 고통을 끌어안고 과거를 애써 회피하려고 하며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평범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에 대한 무한 긍정과 미래에 대한 환상이 대학교를 들어가면서, 직장을 구하면서, 결혼을 하면서, 자식을 키우면서 좌절과 포기, 체념으로 바뀐 사람들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만은 인생의 탄탄대로에 있을거라는 어렸을 적 생각은 실제 현실을 경험하면서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으면 어딘가에 살아있을 온두같은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게 되고, 나는 그런 공포를 겪고 싶지않다는 소망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나처럼 평범하게 살기도 얼마나 힘든가라는 고마움도 갖게 되구요.


좀 특별한 눈을 가진 작가가 쓴 소설은 감정의 무의식을 자극하며 가벼운 매체가 주는 즐거움보다 더 깊은 내면의 행복 도파민을 끌어내줍니다. 약속시간이 두세시간 빌 때, 커피숍이나 조용한 곳에 앉아 이런 소설책을 읽는 것도 많은 즐거움을 줄 겁니다. ^^